변신 로봇 완구가 어머니의 품보다 좋았던 시절. 친구가 집에 놀러왔고 난 아끼는 장난감들을 꺼내 보였다. 얼마 후 장난감을 가지고 함께 놀던 친구가 돌아갔다. 하필이면 왜 그때 바닥에 늘어놓은 장난감 중 하나가 보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을까. 친구가 집에 왔다 간 일과 장난감이 없어진 사건 중 무엇이 먼저였는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게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그 나이에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러질 못한 나는 대신 세상 모르는 표정을 짓던 친구를 의심했던 것 같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함께 어울리긴 했지만 집으로 놀러오라는 말은 다시는 꺼내지 않았으니까. 영화 <좋은친구들>의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 한 자락이 불쑥 찾아 들었다. 영화에는 다 큰 어른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골자는 비슷하다. 지성, 주지훈, 이광수가 연기한 세 친구는 고교동창에다 어깨를 지붕처럼 맞대고 서로를 감싸온 절친한 사이지만 일생일대의
몇 년 사이 진한 남자들의 브로맨스를 내세운 한국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현실과 거리가 먼 내용이 태반이다. 우스갯 소리로 주인공의 직업은 둘 중 하나다. 조직폭력배 아니면 형사. 냉혹한 밑바닥 세계를 배경으로 관습처럼 총과 회칼이 난무한다. 영화는 ‘진짜 남자들의 진짜 이야기’라고 광고하지만 남자인 나도 폭력을 미화하는 데 소모되는 그 진한 핏빛 우정에 젖어들기 힘들다. “흔한 조폭 영화처럼 서로가 잔인하게 죽이려 드는 장면 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는 지성의 말처럼 <좋은 친구들>은 현대인들이 최선을 다해 사느라 잊고
좋은 친구들>을 관통하는 정서에는 ‘바로 이게 남자들의 의리야’라며 남자들이 반할 만한 면면을 갖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지성이 출연을 결심한 이유가 있다. 이번 영화에서 그가 맡은 현태는 청각장애를 겪는 아내와 딸을 둔 구조대원이다. 절친한 친구들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는 그의 삶은 강도 사건으로 부모를 잃게 되면서 송두리째 바뀐다. 범인을 잡기 위해 악착같이 사건 조사에 나선 현태는 갈수록 친구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사실 재미있는 캐릭터는 아니에요. 그저 단단하고 올바른 사람이란 인상이랄까. 뚜렷한 개성이 없기 때문에 주인공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어요. 배우는 캐릭터에 명확한 매력이있어야 연기하기가 수월해요. 그런 점에서 현태는 까다로운 캐릭터인데 지금내가 그 역할을 표현했을 때 어떤 색깔이 나올지 궁금했지요.” 역시 관객과 배우의 눈은 다르긴 다르다. 지성이 까다로운 역할에 욕심이 나는 건 도전을 수락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에 가능했을 터다. 그는 모난 곳 없는 베테랑 배우다. 현대극부터 사극까지 다양한 작품을 해왔다. 그 안에서도 꾸준히 주연을 맡았다. 이는 지성이 동시대의 배우란 뜻이기도 하다. <비밀> <로열 패밀리> <뉴 하트>에서는 너그럽고 바른 남자의 모습을 보였고 <김수로> <대풍수>를 통해 때로는 송곳 같은 날카로움을 지닌 야망의 남자가 됐다. 지성은 자신을 시험해보고 수줍게 망설이는 감각들을 충돌질하려는 배우이기도 하다. <나의 PS 파트너>에선 “평소 바르고 젠틀한 그의 이미지를 구겨놓고 싶었다”는 감독
지성은 지인들에게 <좋은 친구들>을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다루는 영화’라 소개하겠노라 했다. “삶에는 언제나 명암이 있어요.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지만 누구에게나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에요.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설마 아닐 거야’라고 바라게 되는 현태의 모습을 통해 그런 부분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이야기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인간의 모순을 들여다보고 그 속으로 침잠하기 위해 지성은 일부러 힘을 뺐다. 액션영화라면 몸을 탄탄하게 만들고, 전문직 역할이라면 기술을 배우면 될 일이지만 ‘절제된 내면 연기’라는 건 다른 차원의 작업이다. “내 역할을 돋보이려 매력을 부여하려 했다면 현태란 캐릭터는 중심을 잃었을 거예요. 무언가 더 만들게 될까 봐 되도록 모니터링을 하지 않고 연기를 체크하지도 않았어요.” 그는 확인을 할 수 없으니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촬영 초반에는 지성의 연기를 보고 반신반의하는 스태프들도 있었다. “그러한 반응이 상처가 됐다기보다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게끔 했어요. 어디까지나 현태는 내가 만든 캐릭터고 내가 곧 현태였으니까요. 사실 내 캐릭터는 이렇게 연기했어요, 라고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싶진 않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관객과의 의리를 지켜낼 것이다. <좋은 친구들>을 촬영하면서 들었던 답답한 마음이 현태의 심정이었을 것 같다는 지성의 이야기는 ‘참 독하다’란 생각을 들게 했다. 그는 캐릭터를 집요하게 분석하고 구조화하기보다 직접 부딪히고 때려보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를 판단하려 든다. 그러니 꾸준하고 성실한 모습이 지성이라는 배우의 본질이라 단정 짓는 건 옳지 않다. 촬영 내내 확신할 수 없는 불안과 그 불안을 확신으로 떨쳐버리고 싶은 의지 속에서 시간을 보냈을 지성은 단단한 만듦새와 묵직함을 지닌 고독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좋은 친구들>은 지성이 극 전반을 홀로 이끄는 ‘원맨쇼’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서 주지훈과 이광수가 커다랗고 듬직한 동료, 때로는 살가운 친구가 되어줬다. 지성은 두 사람을 ‘좋은 배우들’이라 일컬었다. “배우마다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다르고 상대역에 대한 기대치도 다를 거예요. 하지만 촬영에 들어가서는 상대 배우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표현을 하더
먼저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를 건넬 줄 아는 탓인지 지성은 얼핏 반듯하고 부드러운 외모로 기억된다. 하지만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지성이란 남자는 건강하게 여물어 가고 있었다. 고밀도의 다부진 근육이 어깨와 등, 팔뚝을 거들며, 짙어진 연기의 농도처럼 한층 굵어지고 선명해진 얼굴선에는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지성은 매일 아침 죽도록 달린다. 러너스 하이를 경험하지 않더라도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그의 육체는 힘을 되찾고 정신은 탄력을 얻는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별다른 일탈이 필요 없는’ 지성이 비로소 남자다움의 면모를 두르게 된 건 고등학생 무렵이다. 서울에서 여수로 전학을 갔을 당시 뽀얀 얼굴 탓에 연약해 보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으레 청춘물이 그러하듯 그 시절에 만난 친구들은 촌놈의 의리를 딱풀 삼아 지금까지 함께해오고 있다. 배우란 직업을 가진 사람은 친구로서 어떨지 궁금했다. 일반적인 직업은 아니니 말이다. “20대 때는 친구들을 리드하는 편이었어요. 그들에게 내가 잘해나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지요. 배우란 직업 덕분에 친구들의 관심도 내게 집중됐어요. 그러면서 누가 어떻게 사는지에 무심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30대가 돼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친구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함께 늙어가는 일도 행복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하다고 봐요.”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 이보다 더 인간적인 소망이 있을까. 어디론가 흘러가는 지성의 삶은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은 가능성과 때로는 격렬했던 한 호흡으로, 그리고 함께 어른이 됐고 ‘사는 게 그렇다’며 신세한탄을 할 수 있는 인연 덕분에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작년 9월에 첫 단추를 끼운 결혼생활을 빼놓을 수 없다. 과연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데 결혼이 필수일까. 지성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결혼은 필수라고 답했다.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은 그는 집안일을 하다가 드라마, 광고 촬영을 하러 가는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워 자발적인 가사노동자가 됐다. 그건 친구, 동료에게 베푸는 배려와는 다르다는 설명이다. “결혼을 하고 난 뒤 우리가 진짜 하나